백만봉의 제자로 있으면서도 평소 이만희가 “백만봉이 이루어도 좋고, 못 이루어도 좋다. 못 이루면 내가 이룬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벌써부터 때를 기다렸던 것을 알 수 있음. 시한부 종말설이 불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3월 14일 백만봉에게서 나온 양을규, 홍종효, 김종택, 이만춘 등 10여 명이 인덕원에 있던 이만희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신천지를 개업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줌. 이 날 홍종효가 대표로 기도하고, 이만희는 계시록 1장을 설교하면서 자신을 ‘사도요한’이라 증거함.
덕원 이만희 집, 모세 장로 신종환의 집, 동산 아파트 지하, 비산동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보좌 구성과 6일 창조 후 7일째 안식의 시한부 역사를 완성한다는 예언으로 사이비 교주의 사기 행각은 시작됨.
이만희도 처음에는 첫 장막을 모방하여 7천사의 실상을 이만희, 홍종효, 홍종기, 이종호, 신문배, 이찬선, 장희문이라 했다가 한 사람씩 이탈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 넣는 등 애들 장난 같은 일을 함. 12사도와 24장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작태를 볼 만했음.
‘1일=1년’으로 해석하여 1981년을 창세기 1장 6일 창조의 첫째 날로 보고, 1987년 9월 14일을 일곱째 날 곧 남자(영)와 여자(육)가 하나되는 신인합일의 영생불사가 이루어지는 날이라 하여 기대가 만발했던 때가 있었음.
드디어 그날이 되었지만 조용히 넘어갔고, 한 해가 지난 1988년 어느 날 이만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거쳐 신천지에 와있던 오천평(별명) 권사님 등 여러 신도들을 불러 각서를 받음. 내용을 잘 모른 채 각서에 서명했던 신도들은 그 내용이 “나는 이만희 선생님이 일곱째 날인 1987년 9월 14일까지 이 역사를 다 이룬다고 말한 것을 들은 사실이 없다”라는 내용인 것을 뒤게 알고 분개함. 이 일로 그들 중 20여 명이 이탈해서 역곡에 있는 조희성의 영생교로 간 사실이 있음.
이만희는 ‘시한부 역사 완성 예언’의 불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창세기 첫째 날의 시작이 1981년이 아니라 넷째 날에 일자와 사시와 연한이 이룬다고 했으므로 1984년으로부터 다시 날짜를 계산해야 한다는 간교한 거짓말로 슬쩍 넘어갔음.
미루어진 그날이 가까워지면서 창세기의 6일 창조 7일째 안식은 ‘1일=1년’에서 ‘1일=1천 년’으로 점차 바꿔지고, 1990년대에 무료신학원이 설립되면서 시한부는 유야무야되었음. 그때의 경험으로 이만희는 절대 시한부를 정하지 않고 다만 “2~3년만 있으면”, “144,000명이 차기만 하면” 등의 교활한 수법으로 신도들을 독려하고 꾀고 있음.
그 결과 현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 출신 윤요한(본명 윤용식), 윤재명 형제(현재 동대문 교회, 화정교회 담임), 그리고 장막성전 출신으로 백만봉의 제자였던 지재섭(현재 베드로 지파장)과 통일 교아류인 생령교회 출신 이복영(전 시온기독교신학원 총원장), 백만봉의 신도로서 이혼하고 위자료를 다 바쳤던 조O자(한 때 총회본부 및 요한지파의 OO부장) 등 사이비 교주들 밑에서 이단 사설에 오랜 동안 깊이 세뇌되었던 자들 외에 초창기 신도들이 누가 남아 있는가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