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 있으면 앞으로는 여기다가 써 둬야 겠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21:19) 왜 선한이가 없느니라 했는가? 그분이 사람이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사셨고, 거하실 수 있었다. ---- [http://no-smok.net/nsmk/%EC%98%A4%EB%9E%98%EB%90%9C%EB%AF%B8%EB%9E%98%EB%B0%98%EC%A7%80%EC%9D%98%EC%A0%9C%EC%99%95%EC%9C%BC%EB%A1%9C%EB%B6%80%ED%84%B0%EB%B0%B0%EC%9A%B4%EB%8B%A4 올만에 보는 잼있는글..] ---- [http://board6.dcinside.com/zb40/zboard.php?id=fantasy&page=4&sn1=&divpage=6&banner=&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4423 중세 물가표] [http://board6.dcinside.com/zb40/zboard.php?id=fantasy&page=8&sn1=&divpage=6&banner=&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4596 사진이 장난 아니다]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28&article_id=0000093893§ion_id=0&menu_id=0 (분처바위) 기독교는 한반도에도 들어왔다. 그 근거는 유물들이다.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역시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과 성모마리아 소상을 말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가 대칭적이며 십자가의 5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이스 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용도가 불분명하나 부착용 장식품인 듯 하다.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가 마리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일부 연구가들이 불교 관련 유물에 나타난 기독교적 요소들을 증거물로 제시한다. 경주 석굴암 전실 내부에 부각된 십이면관음상과 십나한상, 범천과 제석천상 등의 옷 무늬나 신발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호석에 부조된 십이지상이나 능묘의 수호적 기능을 수행하는 무인석상의 의장은 경교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오기 전에 불상의 제작을 비롯해 간다라 미술 등 불교 문화가 그리이스 문화에 바탕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불교의 유물 가운데 순수 서역적 요소가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유물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다른 방증적 유물이나 기록을 첨가해야 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기독교적 용어와 구약성서의 전설이나 신화와 비슷한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신라 신문왕 (재위 681-691) 때의 고승 혜통에 대한 찬문에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외도는 기독교일 가능성이 있다. 혜통은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밀교의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한 후 그의 천거로 당 고종 (재위 650-683)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종이 고대 동방기독교 즉 경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의 후계자로 중국 기독교 부흥의 주인공이다. 그는 중국 모든 주에 경교사를 건립하여 수 많은 성읍에 경교사원이 충만하게 되게 했다. 이런 고종과 친분을 맺은 혜통은 당연히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외도로 인지한 것은 신라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삼국유사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사량리의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거나, 29대 태종대왕 5년 4월에 청개구리 수 만 마리가 나무 위에 나타나 서울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다 100여 명이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창세기의 여자 창조기사와 출애굽기의 개구리 재앙을 연상시킨다. 조선조 헌종(재위 1835-1849) 때 소운거사 이규경이 찬술한 '오주연문'에 따르면 땅속에서 '경교유행중국비'란 액제가 있는 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781년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다. 1928년 6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 부근에서 요나라의 성종(983-1031)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에 상당 수의 경교 신도들이 있었다. 이 때는 고려 초기다. 그 후에도 안산 일원에서 여러 점의 기독교 관련 유물들 즉 십자가와 장식품 등이 발굴되었으니 발해와 요와 거란에 경교가 유행했었다는 말이다.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기독교인이 일본에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속일본서기에 따르면, 천평8년 (738)에 일본 고승 홍법대사가 페르시아의 의사 이밀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그는 천황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 의사 이밀은 페르시아 출신의 의사로 경교신자였다. 중국 당대에 경교가 성행하던 시기인 태종부터 덕종까지의 150년 동안은 많은 신라승들이 입당구법하여 자연스럽게 경교와 접했다. 이들에 의해 신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일신라는 중국 뿐만 아니라 비잔틴을 비롯한 서역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으므로 기독교가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불교의 기독교적 요소도 우리가 간과하면 안된다. 극락정토사상이나 미래와의 관계에서 현재를 파악하는 미륵불 사상은 원시불교에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는 중국 당대에 이르러 기독교 즉 경교와 때로는 융화관계에, 때로는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기독교 전파에 관련했다. 불교와 경교는 애당초 친구였다. 경교는 그 이름 자체가 융화와 타협의 산물이다. 경교는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파사교'라 했고, 현종 때 칙령으로 로마교란 의미에서 '대진교'라 했으며 후에 '커다란 광명'이란 의미에서 '경교'라 했다. 경교의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이 불교를 비롯한 유교나 도교의 대응어로 표현된다. 삼위일체는 '삼위묘신' 동정녀는 '실녀' 부활승천은 '청오승진' 구원은 '제도' 주교는 '법주' 하느님은 '건'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교를 사경사불 즉 '기독교 같기도 하고 불교 같기도 하다'라 했다. http://cafe.naver.com/historyth.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3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제6권 "발해.가야 생활관"(사계절,1만6천8백원)이 나왔다. 시기적으로나 성격상 서로 거리가 먼 발해와 가야를 함께 묶은 이유는 민족사의 주요 부분이 빈 자리로 남아있어서는 안된다는 각성 때문.편찬위원회는 『발해건국자 대조영의 후손이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십자가와 마리아상같은 그리스도교 계통의 유물이 발해에서 출토됐다는 점』,발해인들이 당나라에서 신라의 문인과 장원급제 경쟁을 벌였고 일본에서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한시를 겨뤘다는 점 등을 주목하며 이를 입체적인 현장취재로 엮어냈다. http://blog.naver.com/bss2079?Redirect=Log&logNo=60019499568